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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forming Suit 02: Sign Language Glove≫ - 이인강 개인전 리뷰

2023.11.21. - 12.09.

 

기계와 함께 살아가기: 위임-하기, 그리고 반려-되기

 

글/ 유지현

 

유리문을 열고 큐브에 들어가면 <퍼포밍 수트 02: 수어글러브(출력)>와 <퍼포밍 수트 02: 수어글러브(입력)>가 우리를 반기는 모양새로 양팔을 벌리고 서 있다. 차가운 메탈로 이루어진 구조물과 LED 패널에 영사되는 정돈된 톤의 <퍼포밍 수트 02: 수어글러브>가 재생되는 사각의 큐브는 마치 이곳이 멸균된 미래의 공간처럼 느껴지게 한다.  <퍼포밍 수트 02: 수어글러브>에는 두 명의 퍼포머가 등장한다. 한 명의 퍼포머가 움직임을 부여하면 다른 퍼포머는 이를 인식하며 받아들인다. 두 퍼포머는 같은 동작을 한번 더 반복하는데, 두 번째 턴에서는 수어를 전달받은 퍼포머가 동작->신호(수어가 수트에 입력되어 전기 신호로 변환된 것)를 받아들이고 체화하는 과정을 통해 본인의 움직임으로 재변환한다. 그리고 이는 두 번의 라이브 퍼포먼스로 재현된다. 이러한 번역의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반복은 어떤 가능성을 만들어낼까?

 

“완전한 신체를 꿈꿔 본 적이 있는가?”

 

이인강은  10여 년간의 복싱 생활 중의 부상이 ‘수트’ 시리즈를 만드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고 회고한다. 자신의 동작을 위임하는 <완벽한 자세>(2019)와 복싱 동작을 기호화하는 <Hack the boxing>(2020)을 거쳐, 부호화된 동작을 기계에 입력하여 타인에게 전달하는 수트 시리즈로 이어진다. 이는 <드로잉 수트 01>(2020), <드로잉 수트 02>(2022), <퍼포밍 수트 01>(2022)에서 <퍼포밍 수트 02: 수어글러브>(2023)로 다변화된다. 가령 <드로잉 수트 01>는 드로잉을 그리는 움직임을 모션캡쳐를 통해 디지털 신호로 복제하여, 타인이 그 행동양식을 재현하는 것을 시도하였다.  <퍼포밍 수트 01>이 대안적 신체를 통해 안무가와 관객 사이의 동작 생성에 대해 다뤘다면,  <퍼포밍 수트 02>에서는 의사소통의 도구로 ‘수어’를 채택하고, 기계를 매개로 이를 주고받는 2인의 퍼포머가 등장한다.  <퍼포밍 수트 02: 수어글러브(출력)>와  <퍼포밍 수트 02: 수어글러브(입력)>는 흉곽을 감싸며 부착되며, 기계의 구조를 그대로 노출한다. 수트의 전선은 상하좌우로 촉수처럼 늘어지면서 움직이는데, 이는 근육의 움직임을 떠올리게 한다.  이 수트는 ‘신체에 의한 가변 크기’로, 이는 ‘사용자 중심’으로 크기가 미세하게 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계가 인간에 감응하여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수어의 동작이 수트에 입력되고 전달되면서 기계를 매개로 타 존재들의 사이가 연결된다. 이러한 연결은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존재양식의 탐구 : 근대인의 인류학』(2023)  ‘8장 기술의 존재자들을 가시화하기’에서 [TEC·NET]는 우연이 아닌 필연적인 관계라 말한바 있다. [TEC·NET]은 행위자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인간-비인간 동맹’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ANT에서 행위자는 인간뿐 아니라 비인격적 대상인 무생물도 포함하는데, 이는 물리적 실체가 없는 대상도 포괄한다.  기술은 인간의 행동을 바꾸는 점에서 비인간적 행위자라 볼 수 있고, 하나의 행위자는 또 다른 행위자와 연결되며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그가 지칭하는 ‘관계’들은 서로 공동체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춤은 본래 공동체적인 것이다. 그리고 수트를 착용하여 기계와 함께하는 <퍼포밍 수트 02: 수어글러브>도 움직임을 통해 공동체를 이룬다. 여기에서는 두 명의 퍼포머가 등장하고, 수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수트’와는 다른 면을 보인다. 수어는 두 개의 손을 활용하여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동작이며, 단순히 묘사의 도구인 것을 넘어 행위자의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수어를 전달받는 퍼포머는 보고 따라 하는 것을 넘어서서 수어를 수트에 입력된 ‘감각’으로 인지하며, 이를 매개로 새로운 세상에 접속한다. 이러한 그의 수트는 기계를  ‘N-차원의 틈새’로 들어가게 하여 타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는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 )는 『트러블과 함께하기』(2021)에서 인간은 종종 자신이 사물들과 살아 있는 존재들에 의해 함께 유능하게 되는 것을 망각한다고 언급한다. 인간과 비인간은 상호작용을 통해 공존하며 함께-되기와 유능하게-만들기를 N-차원의 틈새 공간에서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의 기계는 사람을 조정하여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위임된 행위를 매개함으로써 일종의 반려-기계로서 작동한다. 동작을 전달받은 퍼포머는 수트를 통해 동작을 감각하는 과정에서 그 속성이 달라져, 차츰 수트에 말을 걸고 그를 친애하는 존재로 삼게 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수트는 생명체처럼 호흡하며 움직이고, 그 과정에서 간혹 오류가 생기고, 그로 인해 재부팅되기도 하며, 퍼포머와 교감하며 긴밀하게 우정을 나눈다. 오류와 완전함, 움직임과 멈춤, 재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사이를 끊임없이 배회하며 하나의 행위자로서 ‘주변’과 함께하는 것이다.

<퍼포밍 수트 02: 수어글러브>에 등장하는 수어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 “동작의 완벽한 전달은 실제적으로는 언제나 완벽하게 이루어지기 어렵지만, 만약 동작이 완벽하게 전달된다면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라는 것을, 그리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아름답고, 그 차이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며, 우리는 성장한다.”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수트는 수어를 발화하는 자와 전달받는 자 사이를 매개하여 분화된 세계를 연결하려 하며, 일종의 유기체로 서로 속성이 다른 존재들끼리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장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수트는 온전함과 이물감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단순한 접합이 아닌 융합의 사이보그를 지향한다.

 

서두의 메탈 큐브 안으로 다시 들어 가보자. 그의 <퍼포밍 수트 02: 수어글러브>는 조각, 영상, 퍼포먼스라는 세 가지의 형태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연결망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연결망은 번역 불가능함을 끊임없이 재현하려 시도하고, 이는 타 존재 ‘사이’를 매개하는 가능성이 된다. 그리고 작가는 기계에 행위를 복제하고, 위임함으로써, 비가역적인 몸에 가역의 미래를 부착한다. 종국엔 기계와 반려-되면서 완전한 신체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간다.  곧, 그의 수트는 존재 양식의 다변화를 통해 타자를 환대하는 기술이며,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구축하는 존재론적인 안무이다. 

 

‘완벽한 자세’에 도달하는 길

백기영(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운영부장)

 

“계속해서 움직여라!”

“머리는 상대에게 보였던 마지막 위치로 가져가서는 안 된다.”

“머리를 그냥 움직이라는 게 아니라, 새로운 위치로 움직이라는 말이다.”

 

미국의 복싱선수 마이크 타이슨(Mike Tyson)의 스승이었던 거스티 다마토(Constantine "Cus" D'Amato)는 지속적으로 머리를 움직이는 복싱스타일을 고안해 냈다. 피커부 스타일(Peek-a-boo style)로 불리는 이 기술은 복서가 더킹(Ducking)과 슬립(slip)을 활용해서 상대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핵주먹(Iron Mike)’을 날리는 전법이다. 타이슨의 타고난 재능도 있었지만, 다마토의 조언은 천재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몸의 자세와 복싱기술을 만들어 주었다. 이처럼 권투에서는 각자의 신장이나 몸의 두께, 주먹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 등을 고려해서 ‘완벽한 자세’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의 복싱스타일과 격돌할 때, 이 자세는 적절한 형태로 변주하게 되는 데, 여기서 두 선수의 충돌과정을 분석하고 몸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트레이너의 역할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경기 중에 트레이너들이 시끄럽게 고함치면서 선수에게 작전을 지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몸의 자세는 몸의 무게와 팔의 각도를 잘 조절하여 무게를 실어 펀치를 날리거나 공격 후, 빠르게 균형을 되찾아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방어동작의 기본이다. 자세가 균형을 찾지 못하면 몸 전체가 흔들리고 상대에게 허점을 노출하게 된다. 최연소 세계 챔피언의 기록을 세우면서 WBC헤비급 챔피언(1986), WBA, IBF헤비급 챔피언(1987), WBC헤비급 챔피언(1996)을 석권한 타이슨은 권투 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스승이 죽고 나서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가 범죄행각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는 등 비참한 말로를 맞는다.

 

이인강은 2015년 무릎과 어깨부상으로 은퇴할 때까지 아마추어 권투선수로 활동했다. 선수시절 그는 자신만의 ‘완벽한 자세’에 도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권투의 자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울기, 무게, 긴장이다. 이인강은 자신에게 맞는 자세에 도달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몸동작을 연구하게 되는데, 그는 마이크 타이슨(Mike Tyson)과 반달레이 실바(Wanderlei Silva)를 연구한 끝에 그 둘의 장점을 결합한 자세에 도달했다. 그의 자세는 목을 거북목처럼 숙이고 앞으로 내민 상태에서 경기에 임하는데, 등을 수그리고 팔꿈치 사이의 간격을 최대한 오므린 채로 몸을 웅크린 상태로 움직인다. 타이슨의 피커부 스타일은 그에게 너무 구부정하고 실바의 목은 너무 나오거나 팔의 가드는 벌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왼손잡이이자 팔이 긴 편이라 아웃복싱 자세가 유리했다. 자신의 몸을 격투에 최적화된 자세로 만들어 가던 어느 날 이인강은 상대와 경기도 치르지 못한 채, 무릎과 어깨 질환으로 무너져 내렸다.

 

더 이상 권투시합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햄스트링이 짧아졌고 허리통증도 생겨났다. 왼쪽 어깨에서 시작된 통증은 오른쪽으로도 전이되었다. 무너진 몸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몸을 어린아이처럼 다루지 않으면 안됐다. 극상근(棘上筋, supraspinous muscle) 재활을 위해서 전기충격 요법을 사용해 보기도 하고 냉찜질, 온찜질 같은 치료를 병행하고 운동을 하다가 다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비슷한 환자들의 온라인 카페에 도움을 구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재활을 위한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인강은 이제 더 이상 선수로 링에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부상의 원인은 잘못된 자세에 있었다. 조금만 주의했어도 지금 같은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아쉬움에 후배 선수들이나 주변에 자신을 대신할 대상을 찾기도 했으며, ‘슬라임 재활’과 같은 움직일 수 없는 근육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그의 재활과정은 어느덧 예술가의 수행이 되어 있었다. 그는 권투 글러브 대신 목장갑을 끼고 도장이 아닌 작업실에서 무너진 몸의 자세를 미술작업을 통해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했다. 권투와 아주 먼 곳에 있었던 미술이 그동안 그의 삶을 다시 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때문에 그의 미술작품에는 몸에 대한 강박적 기억이 남아 있다.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는 그의 책 『몸짓들』에서 ‘몸짓’이 간여하고 있는 생리적, 심리적, 문화적, 경제적 요인들에 관해서 분석했다. 플루서는 마지막 장에서 ‘탐구의 몸짓’이 ‘학문의 위기’와 함께 대두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의 몸짓은 100년 전과 거의 같은 반면, 춤을 추거나 앉거나 먹는 것 같은 다른 몸짓들은 이와 달리 새로운 구조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와 같은 변화의 원인을 그는 우리의 몸짓은 이전과 달리 과학연구의 구조를 갖게 되며 ‘탐구의 몸짓’이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인적인 기술이 요구되었던 근대이전의 미술활동은 물질을 예술적으로 변형시키는 기술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었다면, 오늘날 동시대 미술은 많은 부분 삶의 통찰에서 오는 비물질적인 활동을 포괄한다. 상대선수의 공격을 민첩하게 피해서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공격을 가하는 격투경기인 ‘권투’는 링 위에 올라 경기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혹독한 훈련으로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 극도의 집중력과 정신력을 요구하는 이 격투기는 이미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서로의 기 싸움에서 판결이 나기도 한다.

 

앞서 타이슨의 사례에서 이미 권투선수의 몸짓은 과학적 연구와 기계적인 움직임을 신체에 구현하고 있으며, 인간들은 자기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부단히 훈련에 매진한다. 훈련을 통해서 초인적인 능력에 도달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이인강의 경우처럼, 몸이 육체적 한계로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사이보그적 신체는 스포츠 선수들이 선망하는 이상적인 몸이겠지만, 정상 스포츠는 약물복용과 인간능력 한계를 넘어서는 기계적 보조 장치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올해 열었던 이인강의 두 번째 개인전 <언데드웨이트 Undead Weight>는 작가의 ‘완벽한 자세 찾기’를 위한 미술적 탐구라 할 수 있다. ‘데드웨이트(Dead Weight)’는 ‘군살 붙은 체중’을 의미하는데 전시제목인 ‘죽지 않는 군살(언데드웨이트Undead Weight)’는 죽지 않고 끝없이 살아나는 군살과 같이 역설적이다. 상대와 마주하고 서 있는 완벽한 몸의 자세를 위한 팔과 다리 관절의 각도는 몸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했다. 20KG자리 캐틀 밸은 벽면으로부터 사선으로 가로질러 팽팽하게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는 붉은 밴드를 끌어당기고 있다. 석고붕대에 캐스팅된 팔꿈치 보조대는 각목으로 떠받쳐진 채로 비닐에 쌓인 찰흙 덩어리들에 의지해 균형을 잡고 있다. 몸이 사라진 공간에서 몸짓을 떠받치는 이 사물들은 퍼포머가 사라진 퍼포먼스의 흔적처럼 신체의 강박을 드러낸다.

 

아슬아슬하고 위태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막대기들은 ‘완벽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작가의 강박이다. 기울기와 무게 사이의 긴장을 만드는 것은 권투선수가 격투를 위해서 필요한 자세지만, 조각가에게 있어서 기울기와 무게 사이의 긴장은 구조물의 안정적인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 있다. 전자가 근육의 이완과 통증에 대한 통찰력을 요구한다면, 후자는 물질의 탄성과 장력을 파악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이인강이 권투선수로서 도달하고자 했던 ‘완벽한 자세’는 예술적 언어와 균형 그리고 미술제도 사이에서의 긴장을 유지하는 미술작가로서의 ‘완벽한 자세’로 서서히 옮겨가고 있다.

기억의 연대기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사진의 본질은 죽음이다(롤랑 바르트). 여하한 경우에도 사진은 현실을 포착할 수가 없다. 현실은 사진에 포착되는 순간 과거 속으로 편입된다. 그렇게 모든 사진은 과거를 향한다. 현실을 흔적으로 만들고 현장을 추억(아니면 기억)으로 만들고 실제를 기호로 만든다. 흔적과 추억과 기호. 하나같이 과거를 증언하는 개념적 도구들이다. 과거를 재생시켜주고 과거를 현재 위로 호출하게해주는 역사적(그리고 어쩌면 정서적) 도구들이다. 이런 과거지향성으로 인해 사진은 그리움을 불러오고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부재하는 현실, 지리멸렬한 현실에 기념비성을 부여해 축성한다. 다시, 그렇게 모든 사진은 부재를 향한다. 한때 존재했었음을 증언해주는 증거로 남는다. 그 안에 기억이 똬리를 튼다. 그렇게 사진은 기억하기를 위한 둥지가 된다. 여기서 작가는 화학적 조작과정을 통해 멀쩡한 사진을 흐릿하게 만들고 희뿌옇게 만든다. 사진을 매개로 기억의 몸이며 시간의 질감을 만든다. 그렇게 흐릿한 기억이, 부재하는 시간이 현실로 재생된다. 작가가 기억을 재생하는 방법이다. 기억을 화석화하고 박제화하는, 그럼으로써 기억을 간직하는 방법이다. 작가는 그 방법을 기억코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작가는 신체부위를 석고로 떠내는데, 특히 얼굴을 집중적으로 떠낸다. 여기서 얼굴은 타자 혹은 익명적 주체를 기억하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표상이 된다. 그 설득력 있는 증거를 데스마스크에서 엿볼 수가 있는데, 데스마스크를 제작하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사자를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얼굴은 개인의 인격이 상영되는 극장(인격의 전면? 인격의 파사드?)으로 볼 수 있겠고, 주체의 전형(사회학적인 혹은 이데올로기적인)과 원형(존재론적인 아니면 신화적인)이 등록되는 기호로 볼 수가 있겠다. 그 연장선에서 작가는 문신을 석고로 떠내기도 하고 사진으로 재현하거나 한다. 여기서 문신은 떠낸다고 떠내질 리가 없다. 문신을 떠낼 수는 없지만, 그 흔적을 떠낼 수는 있다. 그마저도 개념상으로만 떠내는 것이지만, 여하튼. 결국 작가가 떠내고 싶은 것(기억으로 간직하고 싶은 것)은 실재가 아닌 실재의 흔적인 것이며, 그 흔적이 기억을 닮았다. 그렇게 작가는 기억을 되불러오기 위해 얼굴을 호출하고 문신을 소환한다. 몸에, 신체에 아로새겨진 기억(몸기억? 몸 저편에서 오는 기억? 몸을 넘어서 오는 기억?)의 흔적을 더듬어 읽는 것이다. 그렇게 기억은 시각적임을 넘어 촉각적이다.

그리고 기억은 사회학적 기억, 어쩌면 집단적 기억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1997년 IMF 당시 일간지 신문에 난 구직광고(쪽광고)를 재현한 것인데, 이자와 일수, 연체와 할부 그리고 부동산 광고 일색이다. 구직광고가 무색하게 정작 구직광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서 작가는 1997년과 2017년을 대비시킨다. 발터 벤야민은 미래를 예비하고 있는 과거를 오래된 미래라고 부른다. 작가는 혹 2017년에서 1997년과의 닮은꼴을 본 것인지도 모르고, 2017년을 예비하고 있었던 1997년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작가는 폐가에서 뜯어온 창틀에다가 문자 텍스트를 영상으로 투사한다. 엄마 보고 싶어요. 근데 다시 생각하면 난 차라리 고아였으면 좋을 것을...아마도 술집여자가 살던 집이었을 것이다. <일기창>이라는 제목으로 미루어 보건데 그 집에서 뜯어온 창이며 일기장이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온데간데없다. 혹 죽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술집을 전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 밖으로 나올 일이 없는 누군가의 상처를 보고 듣는 것은 기묘한 경험이다.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쓴 텍스트는 없다고 했다. 심지어 일기장에서마저도. 그는 어떤 독자를 상상했을까.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독자였을까. 그렇게 때로 기억은 폭력적이다. 세상 밖으로 나올 일이 없는 누군가의 상처를 불러내서라기보다는 자신을 유일한 독자로 가정한 텍스트라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 <일기목>에서 작가는 폐목에 그날그날의 일기를 인두로 쓴다. 일기가 무색하게 일기는 날짜와 함께 최소한의 정보만 기록한 것이어서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작가는 알 것이다. 이런 암호 같은 일기가 술집여자가 쓴 일기와 비교된다. 접근불가능한 일기가 접근 가능한, 그럼에도 오히려 먼, 아득한, 손에 잡히지가 않는 일기와 비교된다.

신양희

 

이인강 작가는 최근 대안공간 눈에서 첫 개인전 《일기창》(2018)을 열었다. 전시장에는 건물의 벽면이나 창틀에서 떼어낸 듯한 반투명의 창문이 여러 개 놓여 있고, 그들 앞에 놓인 프로젝터로부터 짧은 글이 투사되는 작업들로 이루어져 있다. 창문에는 “요즘은 매우 우울하다. 왜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을까? … 한편으론 두렵고 매우 그럴 듯한 이야기다.”, “… 떠난 사람들처럼 나 역시 아버지가 남긴 적은 보상금을 들고 그 길로 마을을 떠났다. 희망을 품고 남은 사람들은 결국 더 이상 고래 만선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마을은 고래처럼 해체되었다.”, “…한 시간여 만의 추격 끝에 포수는 방아쇠를 당겼다. 출항 후 이틀만의 고래였다. 90여 톤의 육중한 고랫배가 출렁거렸다.”와 같은 글이 각각 투사되어 있다. 이 글들은 전시의 단서를 제공하지만 명확한 이야기는 추측하도록 만든다. 낡고 오래된 창문들이 주는 무게감과 글의 애잔함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어떤 곳의 혹은 누군가의 기억을 소환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 전시는 작가가 장생포 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하는 동안 나온 일단의 결과물이다. 작가는 이곳에 거주하면서 이 지역에 대해 궁금해 하지만, 이곳의 역사적이고 지역적인 특성은 집단적 기억으로 상징화된다는 것을 눈치 챈다. 장생포는 공업지역이기도 하지만 과거 포경업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들은 기록보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경우가 더 많은데, 작가는 이러한 이야기에 주목하여 과거의 어떤 기억을 불러낸다. 사람이 떠난 빈 집들에서 흔적을 찾고자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창문이라는 오브제와 발견된 일기장(1991년 무렵 20대 여성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을 통해 장생포에 대한 단상을 담아낸다. 전시를 통해 드러난 장생포의 단면은 깊고 넓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작가가 그곳의 흔적을 찾고 누군가의 증언을 따라가면서 어떻게든 자신이 머문 곳이 간직한 기억과 마주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인강 작가의 이전 작업들도 과거를 끌어내고 기억을 불러내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첫 개인전 또한 이전 작업들이 보여준 접근법과 무관하지 않은 듯 보인다. <기억코팅>, <기억코팅2>, <기억의 빛>, <날아가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 <1997.11.22.>, <붉은 형들> 등은 사진, 회화, 조각, 영상 설치 등에 따른 매체적인 차이를 드러내고, 주제를 풀어내는 접근도 달라 보이지만, 유사한 관심과 태도가 엮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억코팅>(2016) 연작은 시아노타입 프린트 기법을 이용하여 과거의 사진들을 캔버스에 새긴 것이다. 이 작업들은 작가가 “기억은 사진을 통해 떠오를 수도 있지만, 그 기억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현재의 시점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작가의 가족사진으로 추정되는 여러 장의 사진은 행복한 한 때를 포착한 것일 텐데, 작가는 여기에 변형을 가하여 푸르른 빛의 음영을 따라 기억을 더 흐릿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 작업과 이어지는 <기억코팅2>(2016)는 같은 기법을 이용하였지만, 작가가 기억하는 문장이나 누군가의 이름, 얼굴과 손 등의 부분을 확대하였으며, 이에 더해 손과 팔 등 신체 일부를 석고로 함께 배치한 것으로 그가 붙잡고 싶은 기억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충돌하는지를 보도록 만든다. 이 두 작업이 작가 개인의 기억을 직접적 소재로 다룬다면 <날아가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2016)는 제논의 역설에서 영감을 얻어 “지금은 무엇이고, 언제부터 기억되는지”를 질문하는 작업이다. 수증기가 나오는 병을 간격을 두고 일렬로 세워 그 위로 붉은 레이저 빛이 지나가도록 설치되었는데, 연기로 인해 붉은 빛은 드러났다 사라지고 끊어지고 연결되고를 반복한다. 이 작업은 기억하는 대상에 대한 소재를 넘어, 보다 근원원적인 질문을 대상으로 삼는다.

 

작가 개인의 주관적 기억을 넘어 사회적인 기억을 끄집어낸 작업으로 <1997.11.22.>(2017)를 들 수 있다. 이 작업은 1997년 11월 21일 IMF 외환위기가 발발한 다음 날인 1997년 11월 22일자 경향신문, 동아일보, 한겨레의 구인, 구직, 부동산, 금융, 아파트 매매, 어음(쓸 분) 등을 알리는 기사를 캔버스에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작가는 이 그림을 통해 위기와 전환의 순간에도 변하지 않고 진행되는 삶의 아이러니한 풍경을 소환한다. 한편 <붉은 형들>은 2009년 학생운동이 바탕이 된 자작소설을 중 일부의 글을 현수막에 프로젝션한 것이다. 작가는 현실에 기초하지만 허구의 주인공을 세워 중간자적 입장으로 이러한 기억을 바라보고자 시도한 것인데, 이 작업은 아직 완전히 진행된 것은 아니다. 이 작업을 유보하는 동안 그가 풀어낸 작업이 《일기창》에서 전시된 작업이다. 작가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그 자신의 시간과 경험, 그리고 기억을 보유하면서도, 사회와 타자의 기억과 접속하여 현실과 허구를 재구성하는 조형을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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